소비자는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는다…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선택이 어떻게 설계되는지 보여줬다
댄 애리얼리의 2008년 TED 명강연에서 시작된 질문…구독료와 기본 설정이 바꾼 선택, 214만 명 연구가 확인한 넛지 효과와 그 한계
우리는 매일 수많은 결정을 내린다. 어떤 상품을 구매할지, 얼마를 저축할지, 어떤 서비스를 이용할지 스스로 판단한다. 자신의 필요와 취향, 경제적 형편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대안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선택은 생각보다 많은 외부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같은 상품이라도 가격을 어떻게 표시하는지에 따라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어떤 항목이 미리 선택돼 있는지, 여러 대안을 어떤 순서로 제시하는지도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소비자는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선택의 환경을 누가 설계했는지는 충분히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Dan Ariely)는 2008년 TED 강연 ‘Are We in Control of Our Own Decisions?’에서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다. 강연 제목은 인간이 자신의 결정을 실제로 통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는 시각적 착시와 구독상품 선택 사례 등을 이용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독립적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소개한 사례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은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구독상품 가격표다. 온라인 구독과 인쇄판 구독, 두 서비스를 결합한 상품을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강연이 전하는 메시지를 인간은 합리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단순한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선택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과 인간에게 판단 능력이 없다는 주장은 다르다. 특정 실험에서 발견된 현상이 모든 소비자와 시장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후 행동경제학 연구에서는 선택을 유도하는 이른바 넛지(Nudge)의 효과를 둘러싼 대규모 분석과 반론이 이어졌다. 일부 연구에서는 선택 구조를 변경했을 때 실제 행동이 달라졌다. 반면 긍정적인 결과가 학술지에 더 자주 발표되는 출판 편향 때문에 효과가 과대평가됐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비합리적이라는 선언이 아니다. 소비자와 시민의 선택이 어떤 조건에서 달라지는지, 그 변화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 검토하는 일이다.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해서 선택의 과정까지 항상 공정한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이 차이는 기업의 가격 전략뿐 아니라 금융과 의료, 공공정책, 디지털 플랫폼의 운영방식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구독상품이 사람들의 결정을 바꿨다
애리얼리가 강연에서 소개한 이코노미스트의 구독상품 사례는 행동경제학의 문제의식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그가 확인한 구독상품에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온라인 전용 구독은 연간 59달러였고, 인쇄판 전용 구독은 125달러였다. 온라인과 인쇄판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결합상품 역시 125달러였다.
가격표만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인쇄판 전용 구독과 결합상품의 가격이 같았다. 동일한 금액을 지불한다면 온라인 이용권까지 포함된 결합상품이 더 유리해 보인다. 인쇄판 전용 상품은 구매할 이유가 거의 없는 선택지처럼 보였다.
애리얼리는 이러한 가격 구성을 활용해 MIT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택 실험을 진행했다고 강연에서 설명했다.
세 가지 구독상품을 모두 제시했을 때 온라인 전용을 선택한 비율은 16%였고, 결합상품을 선택한 비율은 84%였다. 인쇄판 전용 상품을 선택한 학생은 없었다.
그렇다면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인쇄판 전용 상품을 제거해도 결과는 같아야 할까.
애리얼리는 해당 상품을 제외하고 온라인 전용과 결합상품만 제시한 또 다른 집단을 조사했다. 그 결과 온라인 전용을 선택한 비율은 68%로 높아졌고 결합상품을 선택한 비율은 32%로 낮아졌다.
구매 대상의 본질적인 조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온라인 전용 구독은 여전히 59달러였고, 결합상품의 가격도 125달러였다. 달라진 것은 선택지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결합상품에 대한 선호는 크게 달라졌다.
이 사례는 흔히 미끼 효과(Decoy Effect) 또는 비대칭적 지배 효과로 설명된다. 상대적으로 매력이 떨어지는 대안을 추가하면 그 대안과 비교되는 다른 상품이 더욱 유리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쇄판 전용 상품은 실제로 선택되지 않았지만 결합상품의 매력을 판단하는 비교 기준으로 작용했다.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가치를 제공하지 않는 선택지도 다른 상품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이 결과는 애리얼리가 강연에서 소개한 학생 대상의 가상 구독 선택 사례다. 실제 소비자가 자신의 돈을 지불한 시장 실험이나 이코노미스트의 실매출 변화를 확인한 자료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특정한 가격 구성에서 나타난 반응을 모든 시장의 구매행동으로 일반화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사례는 소비자의 판단이 상품의 절대적인 가치뿐 아니라 주변에 제시된 비교 대상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인간은 가격을 계산하는가, 비교할 기준을 찾는가
전통적인 경제학의 일부 모형에서는 소비자가 일관된 선호를 가지고 여러 대안 가운데 효용이 높은 것을 선택한다고 가정한다.
상품의 가격과 품질, 소비자의 소득이 주어지면 그 조건에 맞는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모형은 시장의 수요와 가격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은 실제 사람들이 항상 이러한 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소비자는 모든 상품의 가치를 독립적으로 계산하기보다 비교하기 쉬운 기준을 활용할 수 있다. 상품의 적정한 가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주변에 제시된 가격이 중요한 참고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서비스를 세 가지 요금제로 제공한다고 가정해 보자. 기본형과 고급형만 있을 때는 두 상품의 차이를 직접 비교해야 한다. 그런데 고급형과 가격은 비슷하지만 혜택이 적은 요금제가 추가되면 고급형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보일 수 있다.
이는 소비자가 반드시 속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비교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상적인 소비에서는 모든 상품의 기능과 가격을 완벽하게 분석하기 어렵다. 비교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에도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간단한 판단 규칙을 사용하는 것은 현실적인 정보처리 전략일 수 있다. 다만 그 판단 규칙을 기업이 이해하고 있다면 상품의 제시 방식을 통해 소비자의 선택을 일정 부분 유도할 가능성이 생긴다.
여기서 중요한 경제적 질문이 등장한다.
소비자가 선택한 상품이 자신의 필요에 적합해서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주변에 제시된 다른 상품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소비자의 만족도와 기업의 판매 전략을 동시에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구매량이 증가했다는 사실만으로 소비자에게 더 좋은 선택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반대로 가격 비교의 효과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마케팅이 소비자를 기만한다고 볼 수도 없다.
상품의 제시 방식이 어떤 정보를 제공하고 어떤 판단을 유도하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도 누군가가 설계한 결과다
선택을 둘러싼 행동경제학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기본값(Default)이다.
여러 대안 가운데 사용자가 별도의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적용되는 조건을 말한다. 온라인 서비스의 알림 설정이나 금융상품의 가입 절차, 개인정보 관련 선택 화면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기본값은 선택을 하지 않은 상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결과를 발생시킨다.
어떤 서비스에서 알림 수신이 기본적으로 허용돼 있다면 이용자는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한 알림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알림 수신이 기본적으로 차단돼 있다면 이용자가 직접 허용해야 한다.
두 경우 모두 선택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결과는 다르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러한 기본값의 효과를 현상 유지 성향과 행동의 관성, 기본 설정을 권고로 받아들이는 심리 등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편이 편리할 수 있다. 조건을 변경하려면 추가적인 정보를 확인하고 행동해야 한다. 기본값이 익숙하거나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는 경우에는 변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특성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복잡한 선택 과정에서 합리적으로 설정된 기본값은 사용자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기본값을 설정한 주체의 이해관계와 이용자의 이익이 다를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서비스 제공자가 이용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기본값으로 지정해 놓는다면 소비자는 자신도 모르게 원하지 않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
선택권이 형식적으로 남아 있다고 해서 모든 기본 설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기본값은 선택의 편리성을 높이는 기술인 동시에 소비자의 권리와 연결되는 중요한 설계 요소다.
장기기증 동의율의 차이는 인간의 마음이 달라서일까
기본값의 영향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는 장기기증 의사표시 제도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에릭 존슨과 대니얼 골드스타인은 2003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Do Defaults Save Lives?’라는 연구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장기기증에 관한 기본 설정이 사람들의 의사표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장기기증 제도는 크게 사전동의 방식과 추정동의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전동의 방식에서는 개인이 장기기증 의사를 명시적으로 등록해야 한다. 반면 추정동의 방식에서는 법률과 제도가 정한 조건에 따라 기증에 동의한 것으로 추정하되 거부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한다.
연구에서는 이러한 기본 설정의 차이가 기증 의사표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결과가 제시됐다.
그러나 여러 국가의 장기기증 동의율 차이를 기본값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국가별 문화와 종교, 의료체계, 가족의 의사결정 구조, 법률과 실제 등록 절차 등이 함께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장기기증 의사표시율과 실제 장기기증 건수는 서로 다른 지표다.
기증에 동의한 사람이 많아도 의료적 조건과 병원의 운영체계, 기증 가능 사례의 규모 등에 따라 실제 기증 건수는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기본값의 변경이 사람의 의사표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과 실제 장기이식이 같은 비율로 증가한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이 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선택의 환경이 공공정책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국가는 시민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선택권이 어떤 절차에서 행사되는지도 결정한다. 동의 여부를 어떻게 묻고, 어떤 조건을 기본값으로 설정하며, 의사를 변경할 기회를 어떻게 보장하는지가 중요하다.
다만 장기기증처럼 개인의 신체와 자기결정권이 관련된 문제에서는 효율성만으로 기본값을 정할 수 없다.
시민의 충분한 이해와 실질적인 거부권, 가족과 의료진의 역할 등 법적·윤리적 기준이 함께 검토돼야 한다.
미국의 퇴직연금은 기본 설정만 바꿨는데 가입행동이 달라졌다
기본값의 경제적 효과를 보여주는 또 다른 연구는 미국의 퇴직연금 제도에서 나왔다.
브리지트 매드리언과 데니스 셰이는 2001년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에 자동가입이 퇴직연금 저축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를 발표했다.
연구 대상은 미국 대기업의 401(k) 퇴직연금제도였다.
기존에는 직원이 퇴직연금에 가입하려면 직접 가입 의사를 표시해야 했다. 이후 기업은 직원이 별도로 거부하지 않는 한 자동으로 가입되는 방식으로 제도를 변경했다.
연구진은 가입 방식이 달라진 이후 직원들의 행동을 비교했다.
분석 결과 자동가입 제도에서는 퇴직연금 참여율이 상당히 높아졌다. 동시에 많은 직원이 회사가 기본값으로 설정한 납입 비율과 투자상품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 변화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퇴직 후 소득을 준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입 절차를 미루거나 별도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자동가입 방식에서는 가입을 위해 추가적인 결정을 내릴 필요가 줄어든다.
하지만 참여율이 높아졌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직원이 최적의 저축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회사가 설정한 기본 납입 비율이 일부 직원에게는 적절할 수 있지만 다른 직원에게는 지나치게 낮을 수도 있다. 투자상품 역시 개인의 연령과 소득, 위험 감수 능력에 따라 적합성이 달라질 수 있다.
기본 설정이 행동을 유도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과 그 설정이 모든 개인에게 최선이라는 사실은 다르다.
따라서 자동가입 제도의 성과를 평가하려면 가입률뿐 아니라 장기적인 저축액과 자산 구성, 직원들의 선택 변경 여부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이러한 구분은 공공정책과 금융서비스에 넛지를 활용할 때 특히 중요하다.
넛지의 효과를 214만 명 자료로 검증했더니
선택 환경을 변경해 행동을 유도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넛지라고 불린다.
넛지는 선택지를 금지하거나 강력한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는 대신, 선택 환경을 설계해 특정 행동을 보다 쉽게 하거나 매력적으로 만드는 접근이다.
행동경제학자인 리처드 세일러와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은 2008년 저서 ‘Nudge’를 통해 이러한 접근을 널리 알렸다.
넛지는 공공보건과 환경, 금융,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 가능성이 검토됐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효과가 충분히 확인됐다고 볼 수는 없다.
2022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된 스테파니 메르텐스 연구진의 메타분석은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했다.
연구진은 214개 문헌에서 보고된 455개 효과크기를 분석했다. 전체 참가자는 약 214만9683명이었다.
논문의 최종 수정본에 제시된 결과에서 선택설계 개입의 평균 효과크기는 코언의 d값 0.45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를 작음에서 중간 정도의 효과로 평가했다.
그러나 0.45라는 수치를 구매율이나 가입률이 45% 증가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코언의 d는 서로 다른 연구에서 나타난 결과를 표준화해 비교하는 통계적 지표다. 실제 행동의 변화 규모는 개입 방법과 대상, 측정 지표에 따라 달라진다.
연구에서는 선택 대안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개입이 정보의 표현 방식을 변경하거나 의도를 강화하는 개입보다 상대적으로 큰 효과를 보이는 경향이 나타났다.
음식 선택 분야에서는 다른 일부 영역보다 더 큰 효과가 관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구진은 긍정적인 결과가 더 자주 발표되는 출판 편향도 확인했다. 이는 전체 효과가 실제보다 크게 추정됐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대규모 메타분석이라는 사실만으로 넛지의 효과가 모든 상황에서 입증됐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같은 연구를 다시 분석하자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
넛지의 효과를 둘러싼 학술적 논쟁은 메타분석 발표 이후 더욱 분명해졌다.
2022년 막시밀리안 마이어와 프란티셰크 바르토시 등이 참여한 연구진은 앞선 메타분석의 출판 편향 보정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같은 연구자료에 다른 통계적 보정 방법을 적용한 결과, 출판 편향을 고려하면 넛지의 평균적인 효과를 확인할 만한 증거가 남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넛지가 모든 상황에서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직접 입증한 결과와는 다르다. 기존 문헌을 종합한 평균 효과가 출판 편향을 고려한 분석에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에 관한 문제였다.
반론을 제기한 연구진은 긍정적인 결과가 과도하게 보고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이에 대해 원래 메타분석 연구진은 자신들이 적용한 분석과 보정 방법을 설명하며 해석의 차이를 논의했다.
같은 자료를 검토하더라도 출판 편향을 어떻게 추정하고 보정하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논쟁은 행동경제학의 정책적 활용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부나 기업이 특정한 넛지를 도입하려 할 때 넛지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일반적인 주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해당 개입이 어떤 환경에서 검증됐으며 비슷한 조건에서 재현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또한 정책의 성과를 측정할 때는 행동이 실제로 바뀌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용자가 안내문을 읽었거나 특정 선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이 실제 행동의 변화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개입 전후의 변화를 비교하고 다른 조건의 영향을 통제해야 한다. 개입의 결과가 장기간 지속되는지, 특정 집단에만 효과가 집중되는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행동경제학의 연구 성과는 유용한 정책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도구의 효과 역시 다른 정책과 마찬가지로 검증의 대상이어야 한다.
유명 행동경제학자의 연구가 철회됐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댄 애리얼리의 강연을 바탕으로 행동경제학을 논의할 때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가 공동저자로 참여했던 일부 연구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됐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2012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발표된 ‘서명 위치가 정직한 자기보고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논문이다.
이 연구는 서명을 문서의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에 하도록 하면 사람들이 더 정직하게 정보를 보고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후 연구자료의 타당성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제기됐다. 학술지는 2021년 해당 논문을 철회했다.
논문 철회 공지에는 원자료의 유효성을 의심하게 하는 근거가 제시됐다는 사실이 명시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논문이 철회됐다는 사실과 특정 연구자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에 관한 책임 판단을 구분하는 일이다.
해당 철회만으로 연구자 개인의 고의적인 부정행위를 단정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이미 철회된 연구의 결과를 검증된 과학적 사실처럼 다시 인용하는 일도 피해야 한다.
이번 강연에서 소개된 구독상품 사례 역시 널리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한 독립적 재현성이 확보된 실험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
따라서 선택설계의 실제 효과를 검토할 때는 별도의 원논문과 메타분석을 함께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분은 세계적인 학자의 명강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다.
강연의 전달력이 뛰어나다는 사실과 강연에 등장하는 모든 연구 결과가 동일한 수준의 검증을 거쳤다는 사실은 다르다.
학자의 명성은 어떤 주장을 검토할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 자체를 사실로 인정하는 최종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행동경제학이 인간의 비합리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그 연구자들 역시 판단과 검증의 오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소비자를 돕는 선택설계와 소비자를 이용하는 설계는 어떻게 다른가
선택 환경이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상품을 이해하기 쉽게 배열하고 복잡한 가입 절차를 단순화하면 소비자의 판단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자신의 필요에 적합한 상품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원리가 소비자에게 불리한 결정을 유도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 서비스에서 무료 체험 이후 유료 구독으로 전환되는 조건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가입은 쉽지만 해지 절차는 복잡하게 설계돼 있다면 소비자는 원하지 않는 비용을 계속 부담할 수 있다.
상품의 실제 가격보다 할인율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추가 비용을 결제 마지막 단계에서 표시하는 방식도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설계를 모두 넛지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넛지는 통상 선택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행동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반면 이용자를 속이거나 중요한 정보를 숨기고, 거부와 해지를 어렵게 만드는 설계는 다크패턴(Dark Pattern) 또는 기만적 인터페이스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두 방식의 차이는 단순히 이용자의 행동을 바꿨는지에 있지 않다.
사용자가 중요한 정보를 충분히 이해했는지, 다른 대안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지, 설계자가 어떤 목적을 추구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소비자가 자신의 필요에 맞는 결정을 더 쉽게 내리도록 돕는 설계와 기업이 원하는 결정을 하도록 이용자의 인지적 약점을 활용하는 설계는 윤리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기업의 매출 증가와 소비자의 이익을 구분해야 한다.
특정한 가격표가 고가 상품의 선택 비율을 높일 수 있다고 해도 그 상품이 소비자에게 더 적합하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행동경제학을 마케팅에 활용할 때는 판매 전환율뿐 아니라 실제 소비자의 만족과 비용 부담, 계약 유지 및 해지 경험까지 함께 평가할 필요가 있다.
AI가 상품을 추천하는 시대에는 선택의 설계자가 더욱 중요해진다
선택설계의 문제는 생성형 AI와 개인화 추천 시스템이 확산하면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과거에는 소비자가 웹사이트의 상품 목록과 가격표를 직접 비교했다. 이제는 AI에게 자신의 필요와 예산을 설명하고 적합한 상품을 추천받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선택의 환경은 화면에 표시된 상품의 배열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AI가 어떤 상품을 검색 대상으로 포함하는지, 어떤 속성에 높은 비중을 두는지, 어떤 대안을 먼저 설명하는지가 소비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여행상품을 비교하더라도 AI가 가격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저렴한 상품이 유리하게 보일 수 있다. 반대로 이동 편의성과 숙박시설의 질을 강조하면 다른 상품이 더 적합한 선택으로 제시될 수 있다.
상품 자체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어떤 정보를 먼저 설명하는지에 따라 소비자의 평가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가능성이 모든 AI 추천에서 실제로 나타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추천 알고리즘의 구조와 학습자료, 상품의 특성, 사용자의 질문 방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AI가 단순한 정보 전달자를 넘어 선택의 환경을 구성하는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소비자는 상품뿐 아니라 AI의 추천 기준도 검토해야 한다.
어떤 정보가 누락됐는지, 광고나 이해관계가 추천 결과에 영향을 주는지, 사용자가 다른 기준을 적용해 결과를 다시 비교할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기술의 발전은 선택에 필요한 노력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을 돕는 시스템이 강력해질수록 그 시스템을 누가 통제하고 어떤 기준으로 운영하는지도 중요해진다.
좋은 정책은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의 연구 성과는 공공정책에서도 활용할 가치가 있다.
퇴직연금 자동가입은 사람들이 장기적인 저축을 시작하도록 돕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건강검진 안내와 예방접종 예약, 공공서비스 신청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식도 이용자의 행동을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행동의 비율이 높아졌다는 사실만으로 정책의 성공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퇴직연금 가입률이 증가했다면 실제로 장기적인 노후소득이 개선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건강검진 예약률이 높아졌다면 필요한 사람이 검진을 받고 이후 적절한 관리까지 이어지는지 검토해야 한다.
행동의 변화는 정책의 중간 성과일 수 있지만 반드시 최종 성과와 동일하지는 않다.
또한 넛지는 구조적인 문제를 대신 해결할 수 없다.
저축할 소득이 부족한 사람에게 자동가입 절차를 제공한다고 해서 경제적 여건이 자동으로 개선되지는 않는다. 의료기관에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예약 안내문을 개선하는 것만으로 의료서비스의 공급 부족을 해결할 수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동 변화에만 집중하면 문제의 원인이 개인의 선택에 있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공공정책은 사람들이 결정을 쉽게 내리도록 돕는 동시에 그 결정을 실행할 수 있는 실제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한 기본값이나 복잡한 절차가 적용되지 않는지 검토해야 한다. 정책의 효과가 전체 평균에서는 긍정적으로 나타나더라도 일부 집단에는 다른 결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설계는 정책의 효율성을 개선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원과 제도적 접근성,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선택을 통제하는가, 선택하도록 설계된 환경에서 판단하는가
댄 애리얼리의 2008년 강연은 인간이 자신의 선택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통제한다고 믿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코노미스트의 구독상품 사례는 비교 대상이 달라지면 같은 상품에 대한 선호도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장기기증과 퇴직연금 연구는 기본 설정이 실제 의사표시와 가입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를 인간은 언제나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으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
선택의 결과는 개인의 선호와 정보뿐 아니라 제도와 환경, 경제적 제약의 영향을 받는다. 선택설계가 일정한 조건에서 효과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인간의 판단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판단이 이루어지는 조건까지 분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넛지의 효과를 둘러싼 메타분석 논쟁은 행동경제학 자체에도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명한 연구와 흥미로운 실험은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 법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여기서 현대사회가 검토해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등장한다.
기업과 정부, 디지털 플랫폼은 선택의 환경을 설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상품을 먼저 보여주고 어떤 조건을 기본값으로 설정하며 어떤 정보를 강조할지 결정할 수 있다.
반면 개인은 자신이 마주하는 선택 환경이 어떤 원칙으로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다.
선택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려면 단순히 여러 대안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용자가 중요한 정보를 이해하고, 기본 설정을 변경하며, 원하지 않는 선택을 쉽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AI가 개인의 취향과 행동을 분석해 추천을 제공하는 환경에서는 선택설계의 투명성이 더욱 중요해진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동을 가장 쉽게 유도하는 시스템만은 아니다. 이용자가 자신의 목적에 적합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효율적인 선택설계가 반드시 정당한 선택설계는 아니다. 판매량과 가입률을 높이는 결과가 나타났더라도 그 과정에서 이용자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됐는지 검토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중요한 경쟁력은 사람의 선택을 얼마나 정교하게 유도하는가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판단을 돕되 그 판단을 부당하게 왜곡하지 않는 설계 원칙을 마련하는 데도 있다.
소비자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그 선택이 완전히 독립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개인의 선택권이 사라졌다고 볼 수도 없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일정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그러한 조건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조건을 설계하며, 그 영향력을 어떤 방식으로 통제할 것인가에 있다.
행동경제학이 제기한 질문은 이제 소비자의 심리를 넘어 시장과 기술, 공공제도의 책임으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내리는 선택은 개인의 결정이다. 그러나 그 결정을 둘러싼 환경은 누군가가 설계한 결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사회가 지켜야 할 것은 선택의 권리뿐 아니라 선택을 유도하는 구조를 이해하고 검토할 권리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신의 결정을 더 잘 통제하려면 먼저 그 결정을 바꾸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선택의 자유는 여러 개의 버튼이 화면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떤 버튼을 왜 선택하는지 이해하고,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유도될 때 이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행동경제학의 발견을 소비자와 시민의 권리로 발전시키는 길일 것이다.
자료: Dan Ariely, ‘Are We in Control of Our Own Decisions?’, TED·EG 2008(2008); Eric J. Johnson and Daniel Goldstein, ‘Do Defaults Save Lives?’, Science(2003); Brigitte C. Madrian and Dennis F. Shea, ‘The Power of Suggestion: Inertia in 401(k) Participation and Savings Behavior’,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2001); Stephanie Mertens et al., ‘The Effectiveness of Nudging: A Meta-Analysis of Choice Architecture Interventions Across Behavioral Domains’, PNAS(2022, 정정본); Maximilian Maier et al., ‘No Evidence for Nudging After Adjusting for Publication Bias’, PNAS(2022); PNAS, ‘Retraction for Shu et al., Signing at the Beginning Makes Ethics Salient and Decreases Dishonest Self-Reports in Comparison to Signing at the End’(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