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노후자금까지 알아서 굴리라는 사회, 정말 괜찮을까
직장인은 이제 월급만 받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퇴직연금을 어떻게 굴릴지 결정해야 하고, 예금과 펀드의 차이를 알아야 하며, 주식 비중을 어느 정도로 가져갈지 고민해야 한다. IRP를 만들고 ETF를 고르고 수수료와 위험등급을 비교하는 일도 노후 준비의 일부가 됐다. 문제는 이 모든 선택이 마치 누구나 당연히 해낼 수 있는 일처럼 취급된다는 데 있다.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인 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 IRP는 가입자가 직접 운용방식을 결정하고, 그 성과가 퇴직 후 받을 돈에 영향을 준다. 금융지식이 많고 투자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넓어진 제도일 수 있지만, 하루 대부분을 본업에 쓰는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떤 상품을 골라야 하는지 모른 채 장기간 현금성 자산이나 낮은 금리의 원리금보장상품에 돈을 두거나, 반대로 수익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상품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디폴트옵션이다. 가입자가 일정 기간 운용지시를 하지 않더라도 사전에 지정한 상품으로 퇴직연금이 운용되도록 하는 제도다. 2023년 7월 본격 시행된 이후 규모는 빠르게 커졌고, 2025년 말 기준 적립금은 53조원, 지정가입자는 734만명에 이르렀다. 전년보다 적립금은 33%, 가입자는 16% 늘었다. 이제 디폴트옵션은 일부 가입자가 이용하는 보조장치가 아니라 수백만명의 노후자금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제도가 됐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엇을 기본값으로 줄 것인가’라는 문제다.
최근 공개된 성과를 보면 위험 수준에 따라 수익률 차이가 상당히 컸다. 2026년 6월 말 기준 디폴트옵션 상품 329개의 3년 성과를 분석한 결과, 고위험 상품의 적립금 가중평균 수익률은 70%를 넘은 반면 초저위험 상품은 9%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위험이 높은 상품의 수익률이 항상 높게 유지된다는 뜻도 아니고, 과거 성과가 미래 수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퇴직연금처럼 수십 년 동안 굴리는 돈에서 지나치게 보수적인 운용 역시 상당한 기회비용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결과를 어디까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상품을 충분히 설명했고 가입자가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정부 역시 위험등급과 수익률을 공개하고 있으니 개인이 비교해 결정하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퇴직연금은 일반적인 투자상품과 성격이 다르다. 실패했다고 다음 달 다시 벌어서 만회할 수 있는 돈이 아니라, 수십 년 뒤 생활비와 의료비, 주거비를 감당해야 할 노후자산이다.
더구나 금융지식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다. 펀드와 ETF의 차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원리금보장이라는 말만 보고 모든 돈을 예금성 상품에 넣는 사람도 있다. 투자 경험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동일한 제도 안에서 동일한 수준의 선택 책임을 져야 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금융지식의 차이가 노후소득의 격차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디폴트옵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상품을 고를 수 있느냐’보다 ‘평범한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합리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느냐’다.
좋은 기본값은 무관심한 사람을 벌주는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장 상황과 가입자의 연령, 은퇴까지 남은 기간을 고려해 적절히 자산을 배분하고, 지나치게 높은 수수료나 장기간 성과가 저조한 상품은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가입자에게 금융교육을 요구하는 것과 별개로 금융회사와 정부 역시 좋은 상품을 설계하고 관리할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가 2026년 처음으로 디폴트옵션 승인상품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에 들어간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최초 승인 후 3년이 지난 상품을 대상으로 장기투자 성격과 안정성, 수익률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성과가 부진한 상품은 개선방안을 마련하도록 하며 문제가 반복되는 상품에는 불이익을 주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제도를 만들어 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노후자산을 제대로 굴리고 있는지 정부가 성과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방향은 필요하다. 퇴직연금 제도의 목표는 가입자에게 투자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퇴 이후 안정적인 소득을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책임이 사라질 수는 없다. 자신의 노후자금이 어디에 투자되고 있는지 한 번도 확인하지 않는 태도까지 제도가 대신 해결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 책임을 강조하는 것과 제도 설계자의 책임을 줄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좋은 금융제도는 전문가만 잘 활용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 바쁜 직장인과 금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크게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제도여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많은 경제적 책임을 개인에게 넘기고 있다. 집을 살지 말지, 연금을 어떻게 굴릴지, 노후에 필요한 돈을 얼마만큼 준비할지 각자가 판단해야 한다. 선택권이 커진 만큼 자유도 늘었지만, 선택을 잘못했을 때의 비용 역시 개인이 떠안는다.
퇴직연금까지 완전히 ‘각자도생’의 영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백만명의 노후자금이 걸린 제도라면 좋은 선택지를 많이 보여주는 것보다, 평범한 사람이 특별한 금융지식 없이도 최소한 크게 뒤처지지 않을 기본값을 만드는 것이 먼저다.
노후 준비가 필요한 사람 모두를 투자전문가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제도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사람이 제도에 맞춰 전문가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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