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반도체 늘어도 재고 부담이 줄지 않는 이유…공시로 본 기업별 회전 격차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반도체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관련 기업의 재고 부담이 자동으로 완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 상장사의 2026년 1분기 공시를 대조하면 같은 차량용 반도체 밸류체인 안에서도 재고자산과 매출채권의 회전 속도는 크게 갈렸다. 반도체를 직접 위탁생산하는 업체, 차량용 칩을 설계해 판매하는 팹리스, 리드프레임과 기판을 공급하는 부품사는 매출이 발생하는 방식과 고객에 돈을 받는 시점이 달라서다.
이번 비교에서는 DB하이텍, 텔레칩스, 해성디에스의 2026년 1분기 보고서와 2025년 사업보고서를 중심으로 재고와 매출채권 흐름을 살폈다. 세 회사는 모두 자동차 전장 확대로 수혜 기대가 거론되는 기업이지만, 재고가 쌓이는 위치와 현금이 묶이는 지점은 같지 않았다. 따라서 ‘차량용 반도체 수요 증가’만으로 공급망 전반의 운전자본 부담을 한 방향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장 빠른 쪽은 파운드리, 가장 무거운 쪽은 부품과 팹리스
DB하이텍은 2026년 1분기 연결 기준 매출채권이 1535억6400만원, 재고자산이 921억1500만원이었다. 같은 보고서의 최근 3개 사업연도 공시에서는 재고자산회전율이 2026년 1분기 기준 연환산 10회, 매출채권은 전액이 6개월 이하 구간에 분포한 것으로 기재됐다. 같은 기간 매출채권은 1350억800만원에서 1540억3600만원으로 늘었지만, 분기 매출 3746억2900만원을 감안해 연환산하면 매출채권 회전은 약 10.4회, 회수일수는 약 35일 수준으로 추정된다.
반면 텔레칩스는 2026년 1분기 연결 기준 매출채권이 272억9900만원, 재고자산이 347억2500만원이었다. 전기 말 대비 매출채권은 줄었고 재고도 감소했지만, 같은 분기 매출원가를 연환산해 계산한 재고자산 회전은 약 3.3회에 그쳤다. 매출채권 회전은 약 8.3회, 회수일수는 약 44일로 추정된다. 해성디에스는 2026년 1분기 매출채권이 1441억2900만원, 재고자산이 1510억9800만원으로 둘 다 전기 말보다 늘었고, 회사가 공시한 재고자산회전율은 4.67회였다. 같은 분기 매출 1886억5214만원을 기준으로 연환산한 매출채권 회전은 약 5.4회, 회수일수는 약 68일로 추정된다.
같은 자동차향 수요를 바라보더라도 수치가 이렇게 갈리는 이유는 제품과 계약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웨이퍼 수탁생산은 생산 개시 전 고객 주문과 공정 관리가 비교적 긴밀하게 맞물리지만, 차량용 칩 설계와 패키징·리드프레임 공급은 고객 승인 주기, 모델별 채택 시점, 안전재고 운영 방식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수요가 좋아져도 어느 단계에서 먼저 재고를 쌓아야 하는지는 기업별로 달라진다.
매출이 늘어도 재고가 함께 불어나는 구조
해성디에스의 경우 이 특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회사는 2025년 사업보고서에서 반도체 Substrate 전체 매출의 약 76%가 리드프레임, 약 24%가 패키지 기판이라고 밝혔다. 2026년 1분기 재고 내역을 보면 원재료가 620억5240만원, 제품이 543억5749만원, 재공품이 295억8894만원으로 잡혀 있다. 완성차용 전력반도체와 산업용 고객 수요가 늘어도 리드프레임과 기판 업체는 원재료와 재공품을 먼저 확보해야 출하 대응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텔레칩스도 재고 부담이 가볍다고 보기 어렵다. 이 회사는 2026년 1분기 판매조건에서 국내 거래는 선수금 거래를 기준으로 하되 업체 신용도에 따라 매출 후 1~2개월의 신용을 부여할 수 있다고 적었다. 동시에 주요 고객사들과 월별·분기별 합의로 공급 물량을 정하고, 장기공급계약에 따른 수주 현황은 없다고 밝혔다. 차량용 칩 채택이 늘어도 장기 확정물량보다 고객 프로젝트 일정과 단기 발주 변화에 더 노출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해성디에스의 매출채권도 단순히 위험 신호만은 아니다. 2026년 1분기 매출채권의 99.46%가 6개월 이하였고, 대손충당금 설정률은 0.298%였다. 다만 이는 채권의 건전성을 보여주는 지표이지, 현금이 빨리 도는지를 바로 뜻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회수일수 추정치는 텔레칩스나 DB하이텍보다 길게 나타난다.
자동차향 비중 확대가 곧바로 현금흐름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
차량용 반도체는 일반 소비자용 반도체보다 인증과 품질 보증 기간이 길고, 한 번 채택되면 공급 기간도 길다. 이 특성은 중장기 매출 안정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초기에는 인증용 샘플과 안전재고, 고객별 맞춤 사양 대응으로 재고가 늘어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 특히 부품사와 팹리스는 완성차 업체가 아니라 1차 협력사, 모듈 업체, 해외 대리점 등을 거쳐 판매하는 경우가 많아 매출채권 회수 시점도 길어질 수 있다.
텔레칩스 공시에는 해외 판매에서 대리점을 통한 간접판매 비중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2026년 1분기 전체 매출 660억7982만원 가운데 디지털미디어프로세서 매출은 459억8912만원이었고, 이 중 해외 대리점 경유 매출만 149억109만원이었다. 판매 채널이 다양할수록 매출 증가가 곧바로 단순한 회전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DB하이텍은 상대적으로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이 회사는 2026년 1분기 보고서에서 웨이퍼 수탁생산과 판매를 주력으로 하는 파운드리 사업을 운영하고 있고, 자동차와 산업용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 제품을 생산한다고 설명했다. 1분기 기준 반도체 부문 매출은 3536억4400만원이었고, 최근 3개 사업연도 공시상 재고자산회전율은 10회였다. 자동차향 물량 확대가 실제 회전 개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반례에 가깝다.
투자와 공급망 판단에서 봐야 할 것은 ‘반도체 수요’보다 계약 구조
결국 차량용 반도체 사용량 증가는 산업 전체의 매출 기회를 넓히지만, 개별 기업의 재고 부담과 현금회수 속도는 사업 모델에 따라 정반대로 움직일 수 있다. 파운드리처럼 주문과 생산이 밀착된 곳은 회전이 빨라질 수 있지만, 리드프레임·기판 업체나 차량용 팹리스는 고객 인증, 채널 구조, 선행 재고 확보 탓에 매출 성장기에도 운전자본이 더 묶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공급망 의사결정이나 투자 판단에서는 ‘차량용 반도체 시장이 커진다’는 산업 서사보다 각 회사의 재고자산 구성, 대손충당금, 매출채권 연령, 판매경로, 장기공급계약 유무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 이번 비교에서도 해성디에스와 텔레칩스는 자동차향 사업 확대 기대가 있어도 회전지표는 DB하이텍보다 무거웠다. 자동차 반도체의 성장성이 곧바로 모든 부품사의 재고 부담 완화를 뜻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이번 비교는 서로 다른 사업모델의 회사를 2026년 1분기 연결 공시 기준으로 대조한 것이다. 해성디에스의 재고자산회전율은 회사 공시치를 사용했고, 텔레칩스와 매출채권 회수일수는 분기 매출과 기초·기말 잔액을 연환산해 단순 추정한 값이어서 연간 확정치와는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럼에도 같은 ‘차량용 반도체 수혜주’라는 분류만으로 재고 부담을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게 확인된다.
자료: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주식회사 DB하이텍 분기보고서(2026.03, 2026년 5월 15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주식회사 텔레칩스 분기보고서(2026.03, 2026년 5월 15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해성디에스 주식회사 분기보고서(2026.03, 2026년 5월 15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해성디에스 주식회사 사업보고서(2025.12, 2026년 3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