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은 올랐는데 임금은 왜 멈췄나…일본은행이 다시 꺼낸 ‘잃어버린 30년’의 숙제
-디플레이션기 임금 경직성과 고용안정 우선 관행이 격차 키워…임금 정상화가 노동이동·생산성 회복으로 이어질지 주목
일본 경제의 오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는 생산성이 개선됐는데도 임금이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노동생산성은 꾸준히 상승했지만 실질임금은 상대적으로 정체했고, 그 결과 생산성과 임금 사이의 격차가 장기간 확대됐다. 일본은행은 최근 이 현상을 분석하면서 디플레이션기 동안 굳어진 임금 설정 관행과 노동시장 구조가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행이 8월 14일 공개한 연구에 따르면 디플레이션기 일본에서는 명목임금 상승률이 0% 부근에 몰리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임금이 아래로 내려가기 어려운 것뿐 아니라 위로 올라가는 데도 강한 경직성이 생겼고, 특히 상방 경직성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는 게 연구진의 분석이다. 기업이 생산성을 높여도 임금을 올리기보다 고용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생산성 향상이 노동자의 보수로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임금보다 고용을 지킨 일본식 선택, 장기적으로 비용이 됐다
일본의 고용 관행은 오랫동안 안정성을 중시해왔다. 경기 침체가 닥쳤을 때 대규모 해고를 피하고 임금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기업과 노동자가 충격을 나누는 문화가 자리 잡았고, 디플레이션이 길어지면서 이러한 선택은 더욱 강해졌다.
단기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기업은 고용을 유지할 수 있었고 노동자는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금이 장기간 거의 오르지 않으면 생산성이 높은 기업과 낮은 기업 사이의 임금 차이도 충분히 벌어지지 않는다. 노동자가 더 높은 생산성을 가진 기업으로 이동할 유인이 약해지고, 기업 역시 우수한 인재를 끌어오기 위해 더 높은 임금을 제시할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된다.
일본은행 연구는 바로 이 부분을 중요한 구조적 문제로 봤다. 임금의 경직성은 단순히 근로자의 소득을 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임금을 신호로 이뤄져야 할 노동력의 재배분까지 막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생산성이 높은 기업으로 인력이 이동하지 않으면 경제 전체의 생산성도 다시 낮아질 수 있다.
결국 임금 정체는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이 됐다. 생산성 증가가 임금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낮은 임금 신호는 다시 노동 이동을 제약해 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을 막는 악순환을 만들 수 있었다.
디플레이션이 임금의 ‘상방 경직성’을 만들었다
임금은 일반적으로 아래로 내리기 어렵다고 설명된다. 근로자가 임금 삭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디플레이션기에는 반대 방향의 경직성도 강하게 나타났다.
물가가 거의 오르지 않고 경제주체들이 “앞으로도 가격과 임금은 크게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되면 기업은 임금 인상을 비용 상승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근로자 역시 물가가 오르지 않으면 큰 폭의 임금 인상을 요구할 필요성을 덜 느낄 수 있다.
이런 기대가 장기간 반복되면서 일본의 임금 협상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대신 상승 동력을 잃었다. 일본은행 연구는 트렌드 인플레이션의 하락과 고용안정을 우선하는 관행이 결합하면서 임금 경직성을 강화했고, 생산성과 실질임금 사이의 격차를 확대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지점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디플레이션은 단순히 물가가 낮은 현상이 아니라 기업과 노동자의 행동방식까지 바꿨다. 가격을 올리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임금을 크게 올리지 않는 것도 정상이라는 관행이 굳어지면서 경제 전체가 낮은 물가와 낮은 임금의 균형에 머물렀다.
지금 일본은 그 균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최근 일본 경제는 과거와 다른 환경에 놓여 있다. 일본은행은 7월 전망에서 일본 경제가 중동 정세에 따른 원유가격 상승의 부담을 받겠지만, AI 관련 수요 확대와 정부 정책 등에 힘입어 완만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봤다. 물가 역시 2026회계연도 하반기부터 2%를 뚜렷하게 웃돌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AI 수요 증가에 따른 반도체 가격 상승과 엔화 약세, 원유가격 상승이 함께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다.
과거와 가장 다른 점은 기업들의 가격·임금 설정 행동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일본은행은 기업들이 이전보다 임금과 가격을 더 적극적으로 올리는 방향으로 행동을 바꾸고 있고, 중장기 기대인플레이션도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런 변화가 정착된다면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저물가·저임금 구조에서 벗어날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물가가 오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명목임금이 올라가도 물가 상승률이 더 높으면 실질임금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가 진정한 임금 정상화에 성공하려면 기업의 생산성 향상이 지속되고, 그 성과가 임금 인상으로 연결되며, 임금 상승이 다시 소비를 지지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임금 정상화의 핵심은 ‘이동할 수 있는 노동시장’이다
일본은행 연구가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임금 문제를 단순한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시장 효율성의 문제로 봤다는 점이다.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하면 근로자는 자연스럽게 그 기업으로 이동하려는 유인을 갖는다. 반대로 생산성이 낮은 기업이 낮은 임금을 유지하면 인력을 붙잡기 어려워지고, 결국 사업을 재편하거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이런 과정이 노동시장의 정상적인 자원 배분 기능이다.
그러나 기업 간 임금 차이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으면 생산성이 낮은 기업에서도 인력이 오래 머무를 수 있다. 일본의 장기 고용 관행과 임금 경직성은 이런 이동을 약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지금 일본의 과제는 단순히 춘투에서 몇 퍼센트의 임금 인상을 확보하느냐에 있지 않다. 노동자가 더 생산적인 기업과 산업으로 옮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기업이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임금 경쟁을 벌이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AI와 디지털 전환은 이 변화를 앞당길 수 있다. 일본은행은 AI 관련 수요가 성장의 주요 지지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는데, AI·반도체·소프트웨어처럼 생산성이 높은 산업으로 인력이 이동하려면 임금 차이가 그 신호 역할을 해야 한다.
일본의 임금 실험은 한국에도 낯설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일본의 경험은 한국에도 시사점이 있다. 두 나라 모두 제조업 비중이 높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생산성 격차가 크며, 노동 이동이 활발하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업이 생산성을 높여도 그 성과가 임금으로 충분히 이전되지 않으면 소비가 약해지고, 노동자는 더 나은 기업으로 이동할 유인을 잃을 수 있다.
특히 임금 격차를 무조건 줄이는 것이 항상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 더 높은 임금을 제시하고 인재를 끌어오는 과정 자체가 노동시장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업 간 이동이 어렵거나 비정규·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사이에 구조적인 장벽이 존재할 때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남긴 교훈은 단순히 임금을 더 많이 올려야 한다는 데 있지 않다. 생산성 향상이 임금으로 연결되고, 그 임금 차이가 다시 노동 이동을 촉진하며, 인력이 더 생산적인 산업으로 이동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일본은행의 최근 연구는 일본 경제가 왜 수십 년 동안 생산성과 임금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했는지를 다시 설명한다. 디플레이션과 고용안정 우선 관행은 단기적으로 충격을 완화했지만, 장기적으로 임금과 노동 이동을 동시에 굳게 만들었다.
이제 일본은 반대 방향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물가가 오르고 기업이 임금을 올리기 시작한 지금, 그 변화가 단순한 비용 상승에 그칠지 아니면 생산성과 임금, 소비가 함께 움직이는 정상적인 경제 구조로 이어질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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