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전환 청구서는 누가 내나…재생에너지·원전·송전망·전기요금의 불편한 계산서
탄소중립과 인공지능(AI), 반도체 산업 경쟁력이라는 세 가지 과제가 동시에 한국의 전력정책을 압박하고 있다. 탄소를 줄이려면 재생에너지를 늘려야 하고, 전력 공급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원전과 가스발전, 에너지저장장치(ESS) 같은 안정적·유연한 전원이 필요하다. 여기에 반도체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가 급증하면서 송전망까지 대규모로 확충해야 한다. 문제는 이 모든 변화에는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정책 논쟁은 오랫동안 원전을 늘릴 것이냐, 재생에너지를 늘릴 것이냐는 발전원 선택에 집중돼 왔다. 그러나 국민이 실제 부담하게 되는 비용은 발전소 건설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산업단지와 도시까지 보내기 위한 송전망, 재생에너지의 출력 변동을 보완할 ESS와 예비전력, 주민 보상, 노후 원전 관리와 방사성폐기물 처리비용까지 모두 전기요금이나 세금, 공기업 부채 형태로 돌아온다.
따라서 에너지 전환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발전원이 절대적으로 옳으냐가 아니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탄소 감축,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총비용이 얼마나 들며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다. 특히 정부가 물가 안정을 이유로 전기요금을 장기간 억제하면서 에너지 전환 비용을 공기업 부채로 미뤄놓는다면 지금의 낮은 요금은 미래 국민이 갚아야 할 청구서가 될 수 있다.
재생에너지냐 원전이냐…이분법으로는 전력망을 운영할 수 없다
한국의 에너지 논쟁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서로 대체할 수 있는 선택지처럼 다루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실제 전력계통에서는 두 발전원의 역할이 다르다.
원전은 가동하면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고 발전 과정의 탄소 배출도 낮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는 연료비 변동 위험을 줄이는 수단이라는 장점도 있다.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처럼 24시간 안정적 전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 늘어날수록 안정적인 기저전원의 가치는 커질 수 있다.
반면 태양광과 풍력은 연료비가 없고 발전 과정에서 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설비 비용이 낮아지고 있으며 기업들이 사용하는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도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태양광은 밤에 발전하지 않고 풍력은 바람에 따라 출력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설비용량 1GW의 태양광과 1GW의 원전을 단순히 같은 발전능력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이유다.
정부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38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를 크게 확대하는 동시에 신규 원전과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무탄소 전원을 함께 활용하는 방향을 담고 있다. 특히 2038년 재생에너지 설비 전망은 121.9GW에 달한다. 정부도 재생에너지를 확대한다고 해서 안정적인 전원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 셈이다.
결국 현실적인 전력정책은 ‘원전 대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원전과 재생에너지, 가스발전, ESS, 수요관리, 송전망을 어떤 비율과 비용으로 조합할 것인가의 문제에 가깝다.
재생에너지 발전소만 세운다고 전기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재생에너지 확대의 숨은 비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전력망이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에 적합한 지역은 전력 소비지역과 멀리 떨어진 경우가 많다. 서남해 해상풍력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과 산업단지로 보내려면 대규모 송전망이 필요하다. 발전소를 지어도 송전선이 없으면 전기를 사용할 수 없다.
한국은 이 문제를 이미 경험하고 있다. 특정 지역에서는 재생에너지 설비가 빠르게 증가했지만 전력망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발전량을 강제로 줄이는 출력제어가 발생하고 있다. 발전설비는 존재하지만 전기를 보낼 길이 부족한 것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ESS와 수요반응, 빠르게 출력을 조절할 수 있는 발전원도 필요하다. 남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부족할 때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역시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장주기 ESS 등 유연성 자원의 확충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재생에너지 비중 상승에 대응해 장주기 ESS를 확대하는 방안이 계획돼 있다.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을 평가할 때 발전단가만 보는 것으로 부족한 이유다. 발전소 건설비에 더해 송전망, ESS, 예비전력, 출력제어 비용을 포함한 ‘시스템 비용’을 함께 계산해야 한다.
원전도 ‘싼 전기’ 한마디로 끝낼 수 없다
원전 역시 발전단가만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기존 원전을 장기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면 연료비와 탄소배출 측면에서 강점이 크다. 그러나 신규 원전을 건설하려면 긴 건설기간과 막대한 초기 투자비가 필요하다. 안전성 강화와 노후 원전 관리, 해체, 사용후핵연료 관리 비용 역시 장기간 발생한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 문제는 대표적인 사회적 비용이다.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전국에서 사용하지만 사용후핵연료 저장·처분시설은 특정 지역이 부담해야 한다. 발전소를 받아들이는 지역과 전력을 소비하는 지역 사이의 비용과 편익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원전을 확대할 때에도 발전단가뿐 아니라 폐기물 처리와 안전관리, 지역 수용성까지 포함한 전주기 비용을 투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재생에너지든 원전이든 정책이 특정 발전원의 장점만 강조하고 비용을 뒤로 미룬다면 국민에게 정확한 선택지를 제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전기는 발전소에서 만들어지지만 ‘송전망’에서 막힌다
앞으로 한국 전력정책의 가장 큰 병목은 발전소보다 송전망이 될 가능성이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지만 새로운 대형 발전소를 수도권에 마음대로 지을 수는 없다. 결국 지방에서 생산한 전기를 대규모 송전망으로 수도권과 산업단지까지 보내야 한다.
정부가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을 마련한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특별법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전력망 사업의 인허가 절차를 개선하고 사업 추진을 앞당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부는 대규모 첨단산업 전력 수요와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전력망을 신속히 확충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한전의 투자 규모도 커지고 있다. 공공기관 경영정보에 따르면 한전의 송변전설비 투자액은 2021년 약 2조6200억원에서 2025년 약 4조7600억원으로 증가했고 2026년 예산은 약 5조4400억원으로 잡혀 있다. 배전설비까지 합치면 전력망에 들어가는 자금은 더 커진다.
전력망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결국 전기요금에 반영돼야 하는 인프라다. 발전원을 어떻게 구성하든 송배전망을 새로 짓지 않고 전력수요 증가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송전선은 필요한데 우리 동네는 안 된다…지역 수용성의 딜레마
전력망 확충에서 돈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주민 수용성이다.
전기는 수도권과 산업단지에서 대규모로 소비되지만 발전소와 송전선은 지방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 주민 입장에서는 철탑과 송전선, 발전시설을 받아들이는 대신 직접 얻는 편익은 제한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이 문제를 단순한 ‘지역 이기주의’로 규정하면 전력망 건설은 더 어려워진다. 국가 전체가 사용하는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특정 지역이 환경·경관·재산권 부담을 감수한다면 그 비용을 사회 전체가 분담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역시 한국의 에너지 인프라 확대 과정에서 주민 반대가 사업 지연과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IEA는 한국이 지역사회와의 소통 기준을 마련하고 공간계획을 에너지 인프라 계획과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한다.
송전망 건설 속도를 높이는 법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주민 보상뿐 아니라 지역 전기요금 혜택, 발전사업 수익 공유, 지역 개발과의 연계 등 보다 장기적인 편익 공유 모델이 필요하다.
AI·반도체 시대에는 ‘값싼 전기’보다 ‘끊기지 않는 전기’가 중요하다
전력비용 문제는 산업 경쟁력과도 직결된다.
반도체 공장은 순간적인 전압 변동이나 정전도 막대한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24시간 안정적으로 대규모 전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제조업과 데이터 산업이 커질수록 전력의 가격뿐 아니라 품질과 안정성이 경쟁력의 일부가 된다.
한국의 전력공급 신뢰도는 현재 높은 수준이다. 한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고객 한 호당 연평균 정전시간은 9.29분이며 송배전 손실률도 3.52%로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조건은 더 어려워진다. 석탄발전은 줄여야 하고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는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는 증가한다.
IEA도 한국은 주변 국가와 전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전력섬’이라는 특성이 있어 전력계통 안정성을 자체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재생에너지와 원전 확대, 석탄발전 감소가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평가했다.
결국 산업 경쟁력을 위해서도 발전설비 투자와 함께 송전망, ESS, 예비력에 투자해야 한다.
전기요금을 누르면 비용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부채’로 이동한다
가장 민감한 문제는 전기요금이다.
전기요금은 국민 생활비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제조업 원가에도 연결된다. 물가가 급등하는 상황에서 전기요금을 빠르게 올리기 어려운 것은 정부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다.
그러나 요금을 원가보다 낮게 유지한다고 발전연료비나 송전망 건설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전은 전기요금의 기본 원칙을 ‘총괄원가를 보상하는 수준’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전력 구매비와 송배전 투자, 운영비 등을 전기 판매수입으로 충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제 에너지가격 급등 시기에 전력구입비가 크게 상승했음에도 전기요금 조정이 이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면서 한전의 재무구조는 급격히 악화됐다.
한전 연결 기준 부채는 2021년 약 145조8000억원에서 2022년 약 192조8000억원, 2023년 202조5000억원으로 증가했다. 2025년 말에도 약 205조6000억원에 달했고 2026년 1분기 기준 약 206조4000억원이었다.
전기요금 인상을 미룬 비용이 상당 부분 공기업의 부채로 옮겨간 셈이다.
공기업 부채도 결국 국민이 부담하는 ‘보이지 않는 전기요금’이다
공기업 부채는 일반 가정의 전기요금 고지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공짜는 아니다.
한전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채권을 발행하면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부채가 늘수록 이자비용도 커지고, 그만큼 송전망이나 미래 전력 인프라에 투자할 여력이 줄어든다.
재무상황이 더 악화되면 결국 전기요금을 올리거나 정부가 지원하거나 자산을 매각해야 한다. 어떤 방식을 선택하더라도 국민이나 기업이 일정 부분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따라서 ‘전기요금 동결’이라는 표현도 엄밀히 말하면 비용 동결이 아니다. 현재 소비자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미래 소비자와 공기업으로 비용 지급 시점을 미루는 정책에 가깝다.
특히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는 전력망과 ESS, 재생에너지, 원전 안전·폐기물 관리 등에 장기간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전력 공기업의 재무구조가 지나치게 약화되면 에너지 전환 자체를 수행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요금 현실화가 필요해도 모든 국민에게 같은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전기요금을 단순히 원가대로 크게 올리는 것도 답은 아니다.
전기는 생활 필수재다. 같은 전기요금 인상이라도 저소득 가구에는 부담이 훨씬 크다. 전력 사용량이 많은 중소 제조업체 역시 급격한 요금 상승을 감당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전기요금 정상화와 취약계층 보호를 분리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전력 가격은 실제 공급비용과 에너지 전환 비용을 가능한 한 반영하되 저소득층에는 에너지바우처 등 직접 지원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중소기업에는 단순한 요금 할인보다 고효율 설비와 공정 개선, 에너지 관리시스템 투자 지원을 확대하면 전력 사용량 자체를 줄일 수 있다.
가격을 모든 소비자에게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는 방식보다 필요한 계층을 직접 지원하는 방식이 비용과 정책 목적을 보다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싼 전기’ 약속보다 실제 청구서다
한국의 에너지 전환에는 공짜 선택지가 없다.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려면 발전소뿐 아니라 송전망과 ESS가 필요하다. 원전을 활용하려면 신규 건설과 안전관리,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석탄발전을 줄이고 가스발전을 보완전원으로 사용하면 국제 연료가격 변동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산업단지와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전력망 투자도 더 커진다.
결국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것은 “어떤 발전원이 더 좋다”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재생에너지를 이만큼 확대하면 발전설비와 전력망, ESS에 얼마가 들어가는지, 원전을 이만큼 활용하면 건설·안전·폐기물 비용이 얼마나 필요한지, 탄소 감축을 위해 어느 정도 비용이 발생하는지, 그 가운데 얼마를 전기요금으로 부담하고 얼마를 정부 재정이나 기업이 부담할지를 제시해야 한다.
정책 선택에 따라 가구당 전기요금과 산업용 전력비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도 가능한 범위에서 공개해야 한다.
에너지 전환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국민이 선택의 ‘편익’은 듣지만 ‘가격표’는 충분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기요금을 억누르면 국민 부담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공기업 부채로 넘기면 당장의 정치적 비용도 줄어든다. 그러나 송전망과 발전소, ESS의 청구서는 언젠가 반드시 도착한다.
에너지 정책의 책임은 그 청구서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얼마를 부담해야 하는지를 먼저 공개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한국의 에너지 전환은 결국 원전과 재생에너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탄소를 줄이면서도 전기를 끊기지 않게 공급하고, 반도체와 AI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지역 주민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세대와 계층 사이에 어떻게 공정하게 나눌 것인지의 문제다.
전기요금은 그 선택의 마지막 결과다. 정부가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것은 ‘요금을 올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지금 내지 않은 비용을 미래에 누가 어떤 형태로 내게 되는가다. 그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면 에너지 전환의 기술적 계획은 있어도 사회적 계약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