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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은 왜 아직 존재하나…헌법을 지키는 최후 수단인가, 무너뜨리는 비상구인가

오피니언주요뉴스

전쟁·무장반란 대비해 평시 권한을 군사 지휘체계로 전환하는 국가긴급권
12·3 비상계엄이 드러낸 남용 위험…폐지보다 선포·집행·해제 통제 강화해야

계엄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국가가 평상시의 행정력과 경찰력만으로 모든 위기를 처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대규모 무장반란으로 행정기관과 법원이 기능을 잃으면 통상적인 법 집행 절차만으로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존립을 지키기 어려울 수 있다. 이때 군사력을 동원해 지휘체계를 통합하고 질서를 회복하도록 만든 국가긴급권이 계엄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77조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서 병력으로 군사상의 필요에 대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법률이 정하는 범위에서 영장제도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와 법원의 권한에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국가법령정보센터, 1988년).

계엄은 정부가 불편한 상황을 해결하는 일반적인 통치수단이 아니다. 국가기관의 기능이 현실적으로 마비되고 병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경우에만 허용되는 최후 수단이다. 정치적 갈등이나 국회의 반대, 지지율 하락과 행정적 어려움은 계엄의 요건이 될 수 없다. 평상시의 헌법 절차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평상시의 법률을 따라야 한다.

한국은 군사적으로도 특수한 조건에 놓여 있다. 남북한은 정전협정 체제에 있고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대규모 공격으로 중앙정부와 지방행정, 통신과 사법체계가 동시에 마비될 가능성까지 제도적으로 배제하기 어렵다. 계엄을 존치해야 한다는 견해는 이러한 안보 현실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제도의 필요성과 권한을 안전하게 행사할 수 있다는 평가는 다른 문제다. 계엄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군대와 기본권 제한 권한을 한곳에 집중시킨다. 선포권자가 위기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헌법을 수호하는 장치가 헌법을 중단시키는 도구로 바뀔 수 있다. 계엄을 둘러싼 논쟁은 존재 여부보다 누가, 언제, 어떤 통제를 받으며 사용할 수 있느냐에 집중돼야 한다.

계엄이 선포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계엄의 본질은 군인이 거리에 나타나는 장면에만 있지 않다. 평상시 행정기관과 경찰, 법원이 나눠 행사하던 권한의 일부가 군사 지휘체계에 편입되는 데 있다.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의 행정기관과 사법기관을 지휘하거나 감독할 수 있다. 비상계엄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특별조치도 가능해진다.

민주주의 국가가 계엄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군대는 외부의 무력 위협에 대응하도록 훈련된 조직이다. 명령과 복종, 신속한 작전 수행이 조직 운영의 핵심이다. 토론과 이견, 권력분립과 적법절차를 중시하는 민주적 행정과는 작동 원리가 다르다.

군사적 효율이 민간 통치에 적용되면 시민은 보호받아야 할 권리의 주체보다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다. 집회와 언론 활동이 군사작전을 방해하는 행위로 해석될 위험도 커진다. 영장주의가 약화되면 체포와 구금, 압수와 수색에 대한 사법적 통제가 줄어든다. 짧은 시간에도 회복하기 어려운 기본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

헌법은 이러한 위험 때문에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면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하도록 하고 있다.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 행정부가 긴급하게 권한을 행사하더라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이를 중단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다.

문제는 통제 장치가 실제 상황에서도 작동할 수 있느냐다. 군과 경찰이 국회 출입을 막거나 의원을 체포하면 국회의 해제요구권은 문서상 권한으로 전락한다. 통신망이 차단되고 언론 보도가 통제되면 국민은 계엄의 이유와 범위를 알기 어렵다. 제도가 긴급할수록 사후 심사만으로는 피해를 예방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드러난다.

계엄은 선포되는 순간부터 권력의 균형을 크게 바꾼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와 행정부 수반, 국군통수권자의 권한을 동시에 행사한다. 여기에 비상계엄 권한까지 더해지면 권력분립은 짧은 시간 안에 크게 흔들릴 수 있다. 계엄의 요건과 절차가 일반 행정명령보다 훨씬 엄격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된 통치수단화

한국의 계엄은 전쟁과 치안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활용됐다. 정부 수립 초기와 한국전쟁기에는 전투와 무장세력에 대응한다는 목적이 강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1952년 비상계엄 문서에는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일부 지역의 무장세력을 소탕하고 치안을 확보한다는 선포 목적이 기록돼 있다(국가기록원, 1952년).

하지만 계엄은 이후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됐다. 1960년 4·19혁명과 1961년 5·16군사정변, 1972년 유신체제 수립 과정에서 군사력이 정치 공간으로 들어왔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선포된 비상계엄은 1980년 5월 전국으로 확대됐고, 신군부의 권력 장악과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계엄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장치보다 내부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언론 검열과 집회 금지, 정치인 체포와 대학 휴교가 계엄이라는 이름 아래 집행됐다. 헌법질서를 회복해야 할 제도가 헌정질서의 정상적인 작동을 중단시킨 경험이다.

계엄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법률 문구보다 이러한 역사에서 형성됐다. 계엄이 선포됐다는 사실만으로 군사정권과 언론통제, 정치적 체포를 떠올리는 이유다. 민주화 이후 계엄이 현실 정치에서 사라진 것도 사회가 군의 정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화가 제도 남용의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헌법과 법률에 권한이 남아 있는 한 선출된 대통령도 이를 사용할 수 있다.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의 민주적 신념에만 의존하는 구조는 안전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좋은 통치자를 기대하는 체제가 아니라 나쁜 선택이 발생해도 피해를 제한하는 체제여야 한다.

한국 현대사는 계엄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실제 전쟁과 무장위기에 대비하는 국가적 필요가 있는 한편, 위기라는 언어를 권력이 독점하면 국민의 자유가 위협받는다. 계엄을 존치하려면 역사적 남용을 예외적 일탈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남용 가능성을 제도의 기본 위험으로 보고 통제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12·3 비상계엄이 확인한 제도의 취약성

2024년 12월 3일 선포된 비상계엄은 민주화 이후에도 계엄 남용이 현실화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은 오후 10시27분께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사령부는 오후 11시23분께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고, 군과 경찰은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에 투입됐다.

국회는 12월 4일 오전 1시2분 재석의원 190명 전원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했다. 윤 전 대통령은 오전 4시20분께 해제 방침을 발표했고 오전 4시29분 국무회의에서 해제안이 의결됐다. 계엄은 수 시간 만에 종료됐지만 국회와 선거관리기관에 병력이 투입됐다는 사실은 제도의 위험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 4일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윤 전 대통령을 파면했다. 헌재는 당시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야당의 탄핵 추진과 입법 활동, 예산 삭감 시도와 부정선거 의혹은 정치적·제도적·사법적 수단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병력을 동원할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봤다(헌법재판소, 2025년).

헌재는 계엄이 우려되는 위기를 예방하거나 대통령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선포될 수 없다고 밝혔다. 적과 교전 중이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돼 행정과 사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어려운 상황이 현실적으로 발생해야 한다는 기준도 제시했다. 계엄 선포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라도 헌법과 법률 위반 여부에 관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다.

절차적 위반도 확인됐다. 헌재는 적법한 국무회의 소집 통지와 토의, 회의록 작성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봤다. 계엄의 시행 시각과 지역, 계엄사령관이 적법하게 공고되지 않았고 국회 통고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국회 출입 통제와 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는 국회의 계엄해제요구권과 권력분립 원칙을 침해한 행위로 인정됐다.

포고령이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을 금지한 점도 중대한 위헌으로 판단됐다. 국회는 계엄을 해제할 헌법상 권한을 가진 기관이다. 계엄사령부가 국회의 활동을 금지하는 것은 통제기관을 통제 대상에 포함시키는 자기모순이다. 헌재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영장주의를 광범위하게 침해한 점도 지적했다.

12·3 비상계엄은 헌법의 해제 장치가 작동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남겼다. 시민과 국회의원들이 국회로 모였고 군과 경찰 일부는 적극적인 물리력 행사를 자제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지켜진 이유를 제도의 완전성에서만 찾기는 어렵다. 헌재도 국회의 신속한 해제 결의가 시민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에 가능했다고 판단했다.

사람들의 용기와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의존해 위기를 넘겼다면 제도적 안전성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다른 명령과 다른 현장 대응이 있었다면 국회 표결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 있다. 12·3 사태 이후의 과제는 민주주의가 우연히 지켜지는 구조를 법률과 헌법에 의해 지켜지는 구조로 전환하는 일이다.

다른 민주국가도 긴급권을 남겨둔 이유

계엄이나 비상권한을 보유한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들도 전쟁과 테러, 대규모 재난으로 평상시 국가 기능이 마비될 가능성에 대비한다. 차이는 긴급권의 존재보다 발동 조건과 기간, 의회와 법원의 통제 방식에서 나타난다.

독일 기본법은 방위사태와 국내 긴급상황에서 군의 역할을 규정하지만 군의 국내 투입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방위사태의 확인에는 연방의회의 의결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나치 독재가 비상권한을 이용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경험을 반영해 군과 행정부의 권한을 여러 기관에 나눠 놓았다(독일 연방법무부 기본법, 2025년).

영국은 민간비상사태법에 따라 긴급규칙을 만들 수 있도록 하면서 의회의 심사와 기간 제한을 둔다. 긴급상황에서도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규칙이 무기한 유지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영국 민간비상사태법, 2004년). 국가가 신속하게 행동할 필요와 의회가 권한을 회수할 필요를 함께 반영한 구조다.

각국의 헌정체계가 달라 제도를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권력구조가 다르고 안보 환경에도 차이가 있다. 한국은 정전 상태라는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기습적인 군사공격이 발생했을 때 국회의 사전 동의를 기다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반론도 타당성이 있다.

그렇다고 대통령에게 선포권을 맡긴 뒤 사후 책임만 묻는 방식이 충분하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 공격처럼 즉시 대응해야 할 상황과 정치적 갈등을 구분하는 객관적 기준이 필요하다. 긴급 선포를 허용하더라도 일정 시간 안에 국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자동으로 효력을 잃도록 설계할 수 있다.

다른 민주국가의 공통된 교훈은 비상권한이 평상시 권한보다 더 많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긴급하다는 이유로 절차를 없애면 권력자는 스스로 위기를 정의하고 권한을 확대할 수 있다. 빠른 결정과 강한 통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가 아니다. 선포 직후 의회와 법원이 자동으로 개입하도록 만들면 두 목적을 함께 달성할 수 있다.

폐지보다 어려운 것은 계엄을 묶어두는 일

계엄 폐지론은 12·3 사태 이후 충분한 설득력을 얻었다. 대통령 한 사람의 위법한 판단으로 군이 국회와 선거관리기관에 투입될 수 있다면 제도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주화 이후 경찰과 재난대응 체계가 발전한 만큼 군에 민간 통치 권한을 맡길 이유가 줄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그러나 계엄 조항을 삭제하는 것만으로 국가긴급권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행정과 사법 기능이 붕괴하면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비상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법률에 근거가 없을 경우 권한의 범위와 통제 절차가 더 불명확해질 수 있다. 계엄을 없앤 자리에 통제되지 않는 사실상의 군사통치가 등장할 가능성도 검토해야 한다.

필요한 방향은 계엄을 통치의 편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하게 묶는 것이다. 먼저 선포 요건을 객관화해야 한다. 정치적 교착이나 행정적 혼란, 집회와 파업, 국회의 탄핵·입법·예산권 행사는 계엄 사유가 될 수 없음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행정과 사법 기능이 어느 정도 마비돼야 하는지도 구체화해야 한다.

국회의 통제 시점도 앞당겨야 한다. 기습공격 등 즉시 대응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대통령이 우선 선포하더라도 짧은 시간 안에 국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승인을 받지 못하면 계엄이 자동 종료돼야 한다. 계엄의 연장에도 정기적인 재승인을 요구해야 한다.

국회의 기능을 물리적으로 보호하는 규정은 더욱 강화돼야 한다. 국회의원과 국회의장, 국회 직원의 출입을 군과 경찰이 제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국회 경내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조건도 극도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국회의 계엄 심의와 해제 표결을 방해한 명령은 처음부터 효력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계엄법은 2025년 7월 개정을 통해 계엄 선포와 변경에 관한 국무회의 회의록 작성을 의무화했다. 계엄 해제 후에는 국방부 장관과 계엄사령관 등이 관련 지휘·감독과 사무 내용을 국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현행범으로 체포·구금된 국회의원도 계엄 해제를 위한 본회의에 출석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내용이 포함됐다(법제처, 2026년).

후속 시행령은 국무회의의 일시와 장소, 참석자의 성명과 직책, 발언 내용과 의결 사항을 회의록에 포함하도록 구체화했다. 계엄 해제 후 30일 이내에 지휘·감독 내용과 국민의 재산 손실 등을 국회에 보고하도록 했으며 2026년 6월 16일 공포됐다(국민참여입법센터, 2026년).

이러한 개정은 절차의 흔적을 남기고 사후 책임을 확인하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회의록과 사후 보고만으로 위법한 병력 투입을 즉시 중단시키기는 어렵다. 계엄이 선포되는 순간 국회와 법원이 작동하도록 하는 실시간 통제가 필요하다. 사후 기록 강화에서 사전·동시 통제로 개혁의 중심을 옮겨야 한다.

사법 통제도 신속해져야 한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가 계엄 선포의 요건을 긴급 심사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나 계엄사령부가 정치활동 금지, 선거기관 장악, 언론사 폐쇄와 같은 명령을 내리면 즉시 효력을 정지할 수 있어야 한다. 수개월 뒤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방식으로는 기본권 침해를 되돌리기 어렵다.

군 지휘체계 내부의 거부 의무도 명확히 해야 한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만 모든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회 해산이나 의원 체포, 선거관리기관 장악처럼 명백히 위헌·위법한 명령을 거부할 기준과 보고 절차가 필요하다. 명령을 거부한 군인과 공무원을 보호하는 장치도 마련돼야 한다.

계엄이 있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계엄은 민주주의가 평상시의 절차만으로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에서 만들어진 제도다. 전쟁과 무장반란으로 국가기관이 무너질 때 국민을 보호할 최후 수단은 필요하다. 특히 군사적 대치가 계속되는 한국에서 비상대응 체계를 완전히 없애는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생존과 정권의 생존은 구분돼야 한다. 정부가 국회에서 정치적 반대에 부딪히거나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과정이다. 이를 국가비상사태로 규정해 군을 동원하는 순간 계엄은 헌법을 지키는 제도가 아니라 권력자를 지키는 수단이 된다.

12·3 비상계엄은 계엄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 사건이라기보다 현행 통제 구조의 약점을 드러낸 사건에 가깝다. 헌법과 계엄법에 선포 요건이 있었지만 위법한 선포 자체를 미리 막지는 못했다. 국회의 해제권이 있었지만 군경의 대응에 따라 표결이 무산될 가능성도 있었다. 사법심사가 가능했지만 즉각적인 권한 중단은 시민과 국회의 행동에 의존했다.

계엄 제도의 개혁은 대통령의 선의를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군 지휘관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국회가 제때 모이지 못하고 법원의 판단이 늦어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가장 나쁜 상황에서도 헌법기관이 살아남도록 설계하는 것이 국가긴급권 개혁의 기준이다.

계엄을 유지한다면 선포 요건과 지역, 기간, 제한할 수 있는 권리와 금지되는 조치를 헌법과 법률에 세밀하게 규정해야 한다. 국회 승인과 자동 실효, 긴급 사법심사, 명령 기록과 공개, 위법 명령 거부자 보호가 하나의 체계로 연결돼야 한다. 선거와 국회의 기능, 언론의 본질적 감시 기능은 계엄 중에도 침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겨야 한다.

계엄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제도가 아니다. 실제로 사용되지 않도록 평상시 위기대응 역량을 갖추고,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가장 짧고 제한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국가가 강해지는 길은 대통령에게 더 큰 비상권한을 주는 데 있지 않다. 비상시에도 헌법과 국민주권이 멈추지 않게 만드는 데 있다.

계엄을 폐지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누구도 계엄으로 민주주의를 장악할 수 없도록 만들었는가이다. 전쟁에 대비하는 제도는 필요할 수 있지만 정치에 맞서는 군사권력은 허용될 수 없다. 계엄이 헌법 안에 남는다면 그 권한의 문은 무겁게 잠겨 있어야 하며, 열리는 순간 국회와 법원, 국민이 동시에 열쇠를 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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