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복상장, 이제 기업의 자유가 아니라 시장의 신뢰로 따져야
한국 자본시장에서 중복상장은 오랫동안 불편한 단어였다. 법적으로는 가능하고, 기업 입장에서는 사업 부문별 가치를 따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금조달 수단이라고 설명돼 왔다. 그러나 시장이 체감한 현실은 달랐다. 모회사가 애써 키운 핵심 사업을 떼어내 자회사로 상장시키면, 새로 상장하는 회사는 성장 프리미엄을 받고, 남겨진 모회사는 껍데기 취급을 받는 일이 반복됐다. 지배주주는 지배력을 유지한 채 자금조달 창구를 하나 더 얻지만, 일반주주는 기업가치 희석과 이른바 ‘모회사 디스카운트’를 떠안는 구조가 고착됐다. 그래서 한국 증시에서 중복상장은 단순한 상장 기법이 아니라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이번에 정부와 한국거래소가 내놓은 중복상장 제도 개선 방향은 그런 점에서 늦었지만 방향은 맞다. 핵심은 분명하다. 더 이상 중복상장을 관행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원칙적으로는 막되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심사 강화가 아니다. “상장할 수 있느냐”보다 “왜 굳이 따로 상장해야 하느냐”를 먼저 묻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동안 국내 시장에서 문제였던 것은 자회사 상장 그 자체보다, 실질적 독립성이 부족한 회사를 별도 상장시켜도 큰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모회사 매출에 기대고, 핵심 기술을 공유하고, 인사와 의사결정도 사실상 한 몸인 상태에서 외형만 따로 떼어내 상장하면, 이는 독립 기업의 시장 진입이라기보다 가치 쪼개기에 가깝다. 시장이 여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투자자는 새로운 성장회사를 산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모회사 일반주주의 몫을 다시 나눠 파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번 개선안이 자회사의 영업·경영 독립성을 엄격히 보겠다고 한 것은 그래서 핵심을 짚는다. 자회사가 진짜로 독립된 사업 기반과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는지, 모회사에 과도하게 기대지 않고도 지속 가능한지부터 따져야 한다. 기업들은 흔히 “시장 친화적 구조개편”이라고 말하지만, 시장 친화적이라는 말은 결국 시장 참여자 다수가 납득할 수 있어야 성립한다. 일반주주가 손해를 보는데도 기업이 성장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더 주목할 대목은 모회사 이사회에 주주 보호 책임을 명시적으로 묻겠다는 점이다. 그동안 많은 기업 이사회는 자회사 상장을 추진하면서도 “법적 절차에 문제 없다”는 식의 형식 논리 뒤로 숨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회사 상장이 모회사 주가와 주주가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분가치 희석은 없는지, 할인 요인은 어떻게 줄일 것인지 스스로 평가하고 설명해야 한다. 주주와 소통하라는 의무까지 부여한 것은 늦었지만 당연한 조치다. 기업의 전략은 경영진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본을 맡긴 주주와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반론도 있다. 성장 사업부를 별도 상장시키는 것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고, 자금조달과 전문경영 체제 강화 차원에서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는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모든 자회사 상장을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이번 제도 개편도 ‘전면 금지’가 아니라 ‘예외 허용’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가 주주 희생 위에 서 있지는 않은지 검증하는 일이다. 시장이 분노해온 것은 혁신 기업의 상장 자체가 아니라, 지배주주에게만 유리한 구조가 너무 쉽게 반복됐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한국 자본시장은 중요한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중복상장을 계속 기업의 자유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시장 신뢰의 문제로 재정의할 것인가. 선진 자본시장의 경쟁력은 상장 건수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투자자가 이 시장에 들어와도 부당하게 손해 보지 않는다는 믿음, 경영진과 지배주주가 소액주주를 손쉬운 비용 처리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 신뢰가 쌓여야 자본이 오래 머물고, 시장이 제값을 받는다.
이번 제도 손질은 그런 의미에서 상장 문턱을 높이는 정책이 아니라, 자본시장 신뢰의 최저선을 다시 긋는 작업이어야 한다. 기업이 진짜 독립된 사업회사라면 당당히 상장하면 된다. 그러나 모회사 주주가치를 깎아가며 외형만 분리한 상장이라면 더 이상 시장이 그것을 성장이라고 불러줄 이유는 없다. 중복상장을 막자는 것이 아니다. 중복상장도 시장과 주주 앞에서 설명 가능한 경우에만 허용하자는 것이다. 그 상식이 그동안 너무 오래 미뤄졌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