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고 찍은 美 증시…서학개미, 반도체 랠리 놓고 엇갈린 베팅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 흐름을 이어가면서 국내 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매수세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달 초만 해도 미국 주식을 대거 팔아치웠던 이른바 ‘서학개미’들은 중순 이후 순매수로 돌아섰다. 다만 투자 방향은 한쪽으로 모이지 않았다. 인공지능(AI) 기대감과 반도체주 강세에 올라탄 투자자들이 있는 반면, 단기 급등 이후 조정을 예상하고 하락 상품에 돈을 넣는 움직임도 뚜렷했다.
27일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 세이브로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들은 지난 13일부터 24일까지 미국 주식을 1억2900만달러, 우리 돈 약 1890억원어치 순매수했다. 이달 1일부터 7일까지 9억700만달러가량을 순매도했던 것과 비교하면 투자심리가 빠르게 돌아선 셈이다.
배경에는 미국 증시의 강한 반등이 있다. 최근 한 달 동안 주요 지수는 일제히 상승했다. S&P500지수는 약 10%, 나스닥100지수는 15%,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6%가량 오르며 고점권 흐름을 이어갔다. 미국과 이란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시장은 충돌 확산 가능성보다 휴전 분위기와 기업 실적에 더 주목하는 모습이다.
특히 기술주와 반도체주가 증시 상승을 주도했다. AI 투자 확대 기대가 이어지는 가운데 인텔의 실적 호조가 투자심리를 자극했고, 엔비디아와 마이크론, 샌디스크 등 주요 반도체 관련 종목도 강세를 보였다. 같은 기간 엔비디아는 10% 넘게 올랐고, 마이크론과 샌디스크도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 등 대형 기술주 역시 동반 상승했다.
하지만 서학개미의 선택은 단순한 ‘추격 매수’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같은 기간 국내 투자자가 가장 많이 사들인 미국 종목은 반도체 업종 하락에 베팅하는 3배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인 SOXS였다. 순매수액은 1억7214만달러에 달했다. 반도체 지수가 하락할 때 수익이 커지는 구조의 상품인 만큼, 투자자 상당수가 최근 급등한 반도체 업종의 조정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에 가까워질수록 고점 부담도 함께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AI 기대감은 여전히 강하지만, 단기간 주가가 빠르게 오른 만큼 차익 실현 매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경계감이 형성되고 있다. 특히 반도체 업종은 실적 기대와 밸류에이션 부담이 동시에 커지는 대표적인 분야다. 상승 탄력이 이어질 경우 수익 기회가 크지만, 금리나 실적 전망이 조금만 흔들려도 조정 폭이 확대될 수 있다.
금리 변수도 투자자들이 민감하게 보는 요인이다. 시장에서는 4월 말 예정된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가 동결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다만 향후 물가 압력이 다시 커질 경우 연방준비제도(Fed)가 매파적 기조를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남아 있다. 기대인플레이션이 다시 높아지는 흐름은 기술주와 성장주에 부담이 될 수 있다. 금리가 높게 유지되면 미래 이익에 대한 할인율이 올라가고,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도 커지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 기업은 대규모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투자가 필요한 업종이다. 금리 상승은 투자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주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도체 하락 ETF에 매수세가 몰린 것은 단기 가격 부담뿐 아니라 금리와 인플레이션에 대한 방어적 판단이 함께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상승에 베팅한 자금도 만만치 않았다. 서학개미 순매수 상위권에는 메모리 반도체 관련 ETF와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샌디스크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는 AI 인프라 투자 확대와 클라우드 수요 증가, 메모리 반도체 업황 회복에 기대를 건 투자자들이 여전히 많다는 뜻이다. 같은 반도체와 기술주를 두고도 한쪽은 과열을 보고, 다른 한쪽은 추가 상승을 보는 셈이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 해외 주식 투자자들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과거처럼 단순히 미국 대형 기술주를 장기 보유하는 흐름을 넘어, 시장 방향성에 따라 레버리지·인버스 ETF를 적극 활용하는 단기 전술형 투자가 늘고 있다. 특히 반도체는 AI 랠리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변동성이 큰 업종이기 때문에 상승과 하락 양쪽 베팅이 동시에 몰리기 쉽다.
증권가의 시각도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물가 부담이 다시 커지고 있어 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가 후퇴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경우 사상 최고치에 오른 미국 증시는 조정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경기 둔화 조짐이 뚜렷해질 경우 연준이 결국 금리 인하에 나설 수밖에 없고, 이는 기술주와 성장주에 다시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국 관건은 AI 관련 기업들의 실적이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할 수 있느냐다. 최근 랠리는 단순 유동성보다 AI 투자 확대와 반도체 수요 증가에 대한 믿음이 핵심 동력이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기술주가 강한 실적 전망을 이어간다면 상승 추세는 연장될 수 있다. 반대로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투자 속도 둔화 신호가 나타나면 고점 부담은 빠르게 현실화할 수 있다.
서학개미가 순매수로 돌아섰다는 사실은 미국 증시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순매수 1위가 반도체 하락 ETF였다는 점은 투자자들이 랠리를 무조건 낙관하고 있지는 않다는 방증이다. 미국 증시는 최고가를 새로 쓰고 있지만, 그 위에서 국내 투자자들은 상승장 지속과 단기 조정이라는 두 갈래 시나리오에 동시에 돈을 걸고 있다.
현재의 미국 증시는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는 시장이다. AI와 반도체는 여전히 가장 강한 성장 서사를 갖고 있지만, 금리와 인플레이션, 지정학적 리스크, 고점 부담은 상승세를 흔들 수 있는 변수다. 서학개미의 엇갈린 베팅은 바로 이 복합적인 시장 심리를 압축해 보여준다. 증시는 최고치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투자자들의 시선은 이미 다음 변곡점을 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