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범죄, 대출 상담 가장해 피해자를 공범으로 만드는 수법 확산
보이스피싱 조직이 ‘대출 상담’이나 ‘단순 아르바이트’를 내세워 접근한 뒤, 피해자 스스로 돈을 옮기게 만들어 공범으로 얽어매는 방식이 확산하고 있다. 생활비 마련이나 소액대출을 찾던 이들이 처음에는 계좌 이체나 서류 전달 같은 심부름을 수행하다가, 어느 순간 현금수거책·전달책으로 전환돼 수사 대상이 되는 사례가 잇따른다. 19일 경찰과 법조계는 이러한 범행이 구직사이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신저를 타고 널리 퍼지고 있다며 각별한 경계를 요청했다.
이들은 ‘고액 알바’, ‘채권회수’, ‘대출금 전달’, ‘거래처 대금 수금’ 같은 문구로 모집 글을 올리고, 채용 절차 없이 곧바로 업무를 맡긴다. 정식 계약이나 신원 확인 없이 거액 현금을 운반하게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경찰은 정상적인 업체라면 이런 비정상적 지시를 내릴 이유가 거의 없다고 누차 경고해 왔다.
수법은 점점 정교해졌다. 경제적으로 곤란한 사람에게 “대출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로 접근해 신용도나 거래 실적을 높여야 한다며 개인 계좌 사용을 요구하거나, 가상자산을 구매해 다른 지갑으로 송금하게 한다. 초반에는 소액 수고비나 생활비를 지급해 일상적 거래처럼 보이게 한 뒤,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규모의 자금을 반복 이동하도록 강도를 높인다. 심지어 보이스피싱으로 이미 피해를 본 이들에게 “대출을 다시 받게 해주겠다”며 현금 수거 역할을 맡기는 변형도 등장했다.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에게서 돈을 받아 조직에 전달하는 구조다.
문제는 뒤늦게 범행임을 깨닫고 “몰랐다”고 주장해도 자동으로 면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2024년 12월 판결에서 현금수거책의 고의 인정 여부를 판단할 때, 조직과의 연락 방식, 근로계약의 유무, 지시 업무의 통상성, 수거 금액과 횟수, 대금 전달 수법, 보수의 수준 등 여러 요소를 종합해 봐야 한다고 밝혔다. 범행 전체 구조를 완벽히 알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이 보이스피싱 범죄의 일부일 가능성을 인식하고도 이를 용인했다면 형사책임이 성립할 수 있다는 취지다.
하급심도 반복 지시와 비정상적 정황을 외면한 경우 엄격히 판단하고 있다. 창원지법은 지난 7월, 저금리 대환대출을 미끼로 한 조직에서 현금수거책으로 움직이며 총 1억4630만 원을 전달한 20대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불법성을 의심하면서도 범행에 거듭 가담한 사정을 불리하게 보았다. 또 다른 사건에선 ‘부동산 관련 업무’로 알고 입사했다는 피고인이 피해자들로부터 고액 수표를 받아 조직에 넘긴 사실이 드러나 유죄가 인정됐다. 대면 면접이나 신용 확인 없이 거액 수거를 맡긴 채용 과정 자체가 비정상적이고, 실제 업무도 일반 회사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다만 모든 현금수거책에게 일괄적으로 유죄가 선고되는 것은 아니다. 피고인의 사회 경험, 조직에 가담하게 된 경위, 조직원이 제공한 설명, 업무 수행 방식 등을 종합해 범죄 가능성 인식이 어렵다고 판단된 사례는 무죄가 내려졌다. 결국 핵심은 당시 상황에서 불법을 의심할 만한 신호가 있었는지, 그럼에도 업무를 계속했는지다.
조직은 초반부터 거액을 다루게 하지 않는다. 서류 발급, 택배·우편 발송, 소액 이체 같은 평범해 보이는 일을 먼저 맡겨 지시 이행 여부를 점검한다. 이후 “일당을 올려주겠다”거나 “대출 승인을 받으려면 실적이 필요하다”는 말로 점차 규모를 키운다. 이미 일부 대가를 받았거나 개인정보·계좌를 제공한 사람은 중도 이탈에 심리적 부담을 느끼기 쉬운 점도 노린다.
가상자산은 새로운 자금세탁 통로로 활용된다. 낯선 이가 보낸 돈을 비트코인이나 테더 등으로 바꿔 지정 지갑으로 전송하라는 요구가 대표적이다. 합법적 금융회사나 대부업체가 개인 대출 조건으로 타인 자금을 대신 송금하거나 가상자산 구매를 지시하는 일은 일반적이지 않다.
전문가들은 피해자 보호에 머물지 않고 ‘가담자 예방’으로 예방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본다. 생계가 급한 청년·취약계층이 표적이 되는 만큼, 구직 플랫폼에서 고액 현금수거 아르바이트의 위험성을 적극 고지하고 불법 대출·구인 메시지를 조기에 차단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경찰 역시 “아르바이트니까 괜찮다”는 인식으로 현금 전달이나 계좌·휴대전화 대여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2026년 3월에도 경찰은 피해자로부터 거액을 수거하러 나온 전달책을 현장에서 검거했는데, 해당 남성은 단순 아르바이트였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장 주의해야 할 신호는 ‘돈의 흐름’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계좌로 거액을 보내고 다른 계좌나 가상자산으로 옮기라 하거나, 모르는 이에게서 현금을 받아 지정 장소에 전달하라고 지시한다면 정상적 아르바이트인지부터 의심해야 한다. 대출을 받겠다며 통장·휴대전화·신분증을 맡기라는 요구도 동일하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절박함을 파고든다. ‘쉬운 돈벌이’와 ‘조건부 대출’의 유혹 앞에서 한 번 더 멈춰 서는 경계심이 공범 전락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