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란, 기업 전략과 시장 지형 재편의 갈림길
–주주환원 강화 명분 속 경영권 방어·재무 유연성 약화 우려… 기업과 국회, 해법 모색 절실
다음 달 정기국회를 앞두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상법 개정의 핵심 의제로 부상했다. 상반기와 8월에 연달아 통과된 개정으로 소수주주 권한이 강화된 데 이어, 이번에는 상장회사가 취득한 자사주를 일정 기간 내 반드시 소각하도록 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개정의 명분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주주환원 확대’이지만, 다수 기업은 “경영권 방어와 재무 유연성 축소”를 우려하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취득 후 1년 내 소각’ 수준의 강한 안이 공개 검토되면서 국회와 기업 간의 갈등이 본격화했다. 기업들은 “기존 보유 자사주에도 소급 적용된다면 충격이 크다”며 예외와 유예를 요구하는 한편, 일부는 시행 전 소각을 서두르거나 교환사채 발행으로 대응하는 모습이다.
핵심 쟁점은 세 가지다. 첫째, 의무 소각의 범위와 시한이다. 자사주 매입의 최종 귀결이 소각으로 고정되면 주가관리 차원의 순매수나 매입 시점 조정의 유인이 줄어든다. 둘째, 적용 대상과 과도기 설계다. 이미 보유 중인 자사주까지 일정 기간 내 소각해야 할지, 임직원 보상이나 M&A 대가로 쓰이는 자사주에는 예외를 둘지 정해야 한다. 셋째, 지배구조와 시장 파급이다. 자사주가 사실상 ‘우호지분’으로 기능해 온 관행이 약화되면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커지고 행동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강화될 수 있다.
정치권의 논리는 단순하다. 한국 상장사의 상당수가 자사주를 장기간 보유하며 지배력 유지나 거래용 자산으로 사용해 왔다. 주주가치를 높이겠다며 매입하고, 이후엔 방어·딜 자산으로 활용하는 ‘목적 전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의무소각으로 매입과 환원을 일치시키면 시장 신뢰를 높이고 밸류업에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소각 가능성이 언급되자 주가 상승 기대가 반영되기도 했다.
기업들의 우려는 현실적이다. 첫째, 경영권 방어 수단이 사라진다. 지금까지는 자사주를 백기사 제공, 담보 설정 등으로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의무소각이 도입되면 일정 시한 이후 이 수단이 사라진다. 둘째, 재무 유연성이 줄어든다. 유동성 위기 시 자사주 매각이나 담보화를 통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진다. 셋째, 소급 적용 문제다. 기존 보유분까지 소각해야 한다면 자본 축소와 자기자본비율 저하가 불가피하다. 이런 이유로 기업들은 자사주 소각 발표를 서두르거나 EB 발행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 있다.
해외 사례와의 비교도 중요하다. 독일은 자본금의 10% 한도 내에서 자사주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하고, 초과분은 일정 기간 내 처분하도록 강제한다. 일본은 이사회 결의만으로 소각이 가능하며, 주주환원 수단으로 적극 활용된다. 두 나라 모두 의무소각보다는 보유·처분 절차와 예외 사유를 명확히 해 남용을 막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한국이 보다 강한 ‘의무소각’을 도입한다면, 임직원 보상·M&A 대가 같은 예외를 분명히 하고 공정한 처분 규율을 마련해야 충격을 줄일 수 있다.
시장에는 득실이 공존한다. 원칙적으로 소각은 주식 수를 줄여 주당가치를 높이는 호재다. 하지만 의무화되면 기업 재량이 줄어들어 배당여력이 약한 중소·중견기업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고배당 대형주로 투자자금이 쏠리며 양극화가 심화할 가능성도 크다. 또한 자사주를 전략자산으로 활용해온 기업들은 자본조달 비용 증가와 신용등급 하락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반면 투자자 측에서는 환원 신뢰도를 높여 외국인 자금 유입에 긍정적일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세제 논의도 뜨겁다. 자사주 소각은 세법상 배당으로 보지 않아 주주에게 직접 과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무소각으로 배당 유사 효과가 늘어나면 과세 형평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 정부는 배당소득 분리과세 확대 등을 포함한 세제 개편을 병행하고 있으며, 제도 시행 시 배당·소각·투자 확대 간 균형이 필요한 상황이다.
기업이 준비해야 할 과제도 명확하다. 첫째, 자사주 전략의 목표를 ‘경영권 방어’에서 ‘주주환원’으로 전환해야 한다. 취득부터 소각까지 계획을 수립해 배당정책과 통합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정관과 내부규정을 정비해 행동주의 대응 리스크를 낮추고, 이사 선임 절차나 이사회 운영 방식을 선제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셋째, 우호주주 네트워크를 재구성해 기관투자자와의 신뢰를 높이고 장기 인센티브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넷째, 증권사·지주사처럼 자본비율에 민감한 업종은 소급 적용 가능성을 고려해 충격을 완화할 자본조달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정책 당국의 과제는 두 가지다. 첫째, 제도의 목적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다. 자사주 매입을 환원 수단으로만 사용하게 하려면 의무소각의 범위, 시한, 예외, 공정 처분 규율을 세트로 제시해야 한다. 둘째, 글로벌 정합성이다. 독일과 일본은 강제 소각 대신 예외와 절차적 통제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한국이 더 강한 방식을 택한다면 과도기, 유예, 예외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시장 혼란을 줄일 수 있다.
결국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단순한 재무 기법 변경이 아니라 지배구조, 자본배분, M&A 전략, 투자자 저변까지 아우르는 룰의 재설계다. 주주환원 강화라는 입법 취지가 실효를 거두려면, 기업의 방어·보상·투자 기능도 함께 보장해야 한다. ‘취득=환원’이라는 대원칙과 ‘예외=투명’이라는 보완 원칙을 동시에 확립할 때만 제도 변화가 투자자 신뢰를 높이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실질적으로 완화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